행성 간 우주여행이 가능한 미래,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 지원자, 그리고 승무원으로 구성된 5000여명의 사람들이
동면 상태로 초호화 우주선 '아발론'에 탑승하여 우주 공간을 이동 중이다.
목적지는 지구로부터 120년 거리에 떨어진 인류의 새로운 터전 '홈스테드 2'.
그런데 누구도 예상치 못한 사고로 남들보다 90년이나 일찍 잠에서 깨어난
짐 프레스턴(크리스 프랫), 그리고 1년 후 깨어난 오로라 레인(제니퍼 로렌스).
과연 한정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두 사람에게는 어떤 일들이 펼쳐질까?
그들이 깨어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학창 시절 그 어디쯤에서부턴가
별과 우주에 대한 동경을 품어왔다.
그래서 지금도 관련 책이나 영화는
크게 가리지 않고 섭렵하려는 편이다.
단순히 우주 여행에 대한 이야기인 줄 알았으나
배경만(?) 우주이고 우리의 삶과 시간이라는
고전적(?) 주제를 다루고 있는 영화였다.
아무 생각 없이 가볍게 보려고 한 영화가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
<패신저스> 속으로 떠나보자.
우리는 항상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모든 일정이 순조롭게 흘러가기를 바라지만
자신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일은 사실 많지 않다.
때로 예측할 수 없고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불현듯
튀어나오는 사건들이 끊임없이 우리 삶에 끼어든다.
주인공들의 삶의 궤적을 크게 바꾸는 계기가
남주(男主)의 입장에서는 우주선의 불운한 고장이고
여주(女主)의 입장에서는 남주의 불경(不經)한 행위이다.
남주의 처지에서는 우주를 떠도는 돌부스러기들이 원망의 대상이고
여주의 처지에서는 남주가 자신의 인생을 망친, 용서 못할 죽일 놈이었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1년의 시차를 두고 두 사람에게 일어난 일은 분명 재난이었다.
이미 일어난 사건을 다시 되돌릴 수는 없음은 더한 비극이었다.
만약 이 상태에서 서로 내 탓 네 탓만 하며 계속 저물어 가는 여생을
낭비했다면 두 사람에게 불쑥 끼어든 시간들은 저주로만 남았을 것이다.
사실, 두 사람에게만 주어진 순간들은
그 자체로는 행운도 불행도 아닐 수 있다.
한쪽을 두둔하거나 체념하는 것은 아니고
누가 잘했고 못했음을 가리자는 것도 아니다.
더 나은 방향으로의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차단된 상태에서
어떻게 하면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선택을 할 것인가의 문제다.
인간은 시간 속 존재이자 관계 속 존재이고 또한 기억 속 존재이다.
'지구'라는 익숙한 터전을 떠나
'개척 행성'이라는 새로운 거주지로 향하는 특권을 누린 주인공들,
각자의 사연은 다르지만, 승객별 등급과 혜택도 다르지만 어찌 되었건
누구보다 먼저 지금과는 다른 삶을 만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하지만 예기치 않은 사고로 인해
두 사람은 각자 꿈꾸던 시간에서 벗어나
낯선 시간 속으로 던져지고 만다.
인간은 시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뭐, 영화에서 광속의 50%로 항해하는
우주선 속에서는 지구보다 시간이 천천히 흐르기는 하지만,
(지구에서 1초가 지날 동안 우주선 승객들은 약 0.67초의 시간만 흐름)
완전히 시간을 초월하여 살 수는 없다는 근원적인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다.
여기서 잠시 사족을 덧붙인다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따라
빛의 속도에 가까워질수록 시간은 느려지고 공간은 줄어들며 질량은 커진다.
패신저스(passengers)는 승객(乘客)들이다.
'타고 가는 손님'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어느 곳에서, 무슨 일을 하며, 어떻게 살든
우리 모두는 멈추지 않고 흘러가는
'시간'이란 배를 타고 각자에게
주어진 '삶'이라는 여정을 떠나는
영원한 손님일지도 모른다.
이곳에서 저곳, 지금에서 나중으로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는 운명을
타고났는지도 모르겠다.
'삶'이라는 바다는
이미 우리 앞에 펼쳐져 있지만
어떤 뱃길을 선택할지는 거의 오롯이
나의 선택에 달려있는 것은 아닐까.
이곳에 올 때까지 수많은 선택을 했듯이
앞으로도 더 많은 선정의 순간들이 기다린다.
만약 남주가 불의의 사고로 미리 깨어나지 못했다면
과연 그의 삶 속에서 여주를 만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주인공 두 명을 제외한 나머지 승객들이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하여 두 사람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세상에 전달할 수 있었을까?
비록 하나의 가능성은 닫혔지만
또 다른 희망이 그 자리를 채운다.
처음에 간직한 꿈은 깨져 버렸지만
꿈꾸지 않았던 만남이 기다린다.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새로운 방향으로 계속
가지를 뻗어나간다.
관계가 피어나고
또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다.
다른 형태로.
기적처럼.
인생은 '문제'의 연속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여러 사람들, 사물들, 사건들로 얽힌
다양한 문제들을 마주하며 살아간다.
사실 문제가 있다는 것은,
비록 조금, 혹은 꽤 스트레스를 받을지언정
우리가 '살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인생에서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죽음과도 같으니까.
아니, 그보다 더한 비극일지도 모른다.
살아 움직이기 때문에 나를 둘러싼 환경들과
수많은 관계를 이루며 지금 이 곳에 존재할 수 있다.
문제는 우리가 살면서 필연적으로 부딪힐 수밖에 없는
사건, 사고들을 언제까지나 남탓만 하며 살 수는 없다는 점이다.
결코 길다고 호언장담할 수 없는 우리 삶에서 이런 태도는
스스로 지옥을 만들어 그 속에 갇히는 꼴이다.
그 어떤 발전이나 변화도 이끌어낼 수 없다.
때로는 정면 돌파로, 때로는 우회경로로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지혜롭고 행복한 인생을 만드는
비결은 아닐까.
두 사람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 무대인 아발론(Avalon),
네이버 영어사전에서는 아서왕이 사후에 갔다고 일컬어지는 곳이라고 한다.
아더왕 또는 아서왕(King Arthur)은
5~6세기경 영국에 실존했다고 알려진 켈트족의 전설적 리더로
엑스칼리버, 원탁의 기사, 카멜롯 등과 맥(脈)을 같이 한다.
지구라는 이생을 떠나 새로운 별이라는 내생으로 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일까. 아무튼 1500여 년 전의 전설이
21세기에도 화려한 영상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모선(母船)과 우주복을 연결하는 생명줄은
안전한 귀환을 보장하는 약속이자
자유로운 활동을 제약하는 한계이기도 하다.
모순적인 두 가치가 공존하는 순간들은
지금도 우리를 어디론가 데려간다.
미처 우리가 몰랐던 곳으로.
나와 너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서로 더 좋은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다면,
생의 의미를 발견하는 순간에 좀 더 다가갈 수 있을 것 같다.
자신이 있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 떠나는 것,
자신이 한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을
성공이라고 한다면, 꼭 물질적인 방법 외에도 얼마든지 다양한 방편들이 있지 않을까.
기억되지 않는다면,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잊혀진다면
그것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던 어느 대사가 어렴풋이 생각난다.
인류가 지금까지 어떠한 형태로든 무언가 끊임없이 남기려 한 이유는,
그것이 담고 있는 각종 메시지와 해석의 가능성은 차치하더라도
앞으로도 영원히 기억되고자 하는 의지의 상징은 아닐까.
내가 블로그에 어리숙한 생각들을 끼적이는 것도,
위와 같은 맥락으로, 이런 무의식적 욕망의
표현으로도 여길 수 있을 듯 하다.
두 사람의 활약상이 여러 사람들에게
오래오래 회자된다면, 수많은 이들의
가슴 속에 머무르며 기억될 수 있다면,
비로소 두 사람은 시간의 굴레를 벗어나
영원한 삶, 성공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언젠가는 끝이 있는 유한한 삶,
생각보다 길지 않은 우리의 인생을
의미 있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기회는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주어진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소중한 순간,
지금 이 시간들을 즐겁고 충실하게
잘 누리자는 것이다.
행복은 거져 받는 것이 아니라
노력해서 발견하는 것이니까.
인생은 공짜가 아니라
기적같은 선물이니까.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어떤 행운을 만나고 있을까,
그리고 어떤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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